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한국인의 영원한 영웅 안중근 의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익히 접해 안중근 의사를 모두 알고는 계시지만 정작 안중근 의사의 유묵인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를 안중근 의사가 아닌 다른 위인분의 유묵으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이 글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위대한 업적을 알아보고,
러시아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에 계신 안중근 의사를 만나보겠습니다.
목차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안중근 의사는 누구?
대한제국 말기에 활약한 계몽 운동가이자 군인이며 독립운동가, 평화적 아시아주의자이다.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목에서 태어나 1910년 3월 26일 순국했다. 유관순, 김구, 안창호, 윤봉길, 여운형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에서 저명한 독립운동가이다.
본래는 천주교의 영향으로 교육사업 등 민족의 계몽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침탈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항일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꾸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후 의군을 조직하였다. 대한독립군의 참모 중장으로서 활동했으며, FN M1900으로 초대 일본 내각총리대신이자 초대 한국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사살하는 의거를 단행하였다. 체포된 후 옥중에서 많은 휘호를 남기고 자신의 사상을 논하는 글인 동양평화론의 서문을 저술하다 사형이 집행되어 생을 마쳤다.
본관은 순흥이며 아명은 안응칠인데 아명인 동시에 자이기도 하다. 가톨릭 세례명은 토마스. 이것에서 ‘도마 안중근’이라는 호칭이 나왔다. 과거에는 한국 가톨릭에서 사도 성 토마스를 종도 성 도마로 음차했기 때문.
(출처:나무위키)
하얼빈 의거
1909년 10월 26일 러시아 제국 하얼빈(Харбин)의 하얼빈역(Харбинский вокзал)에서, 대한제국 출신의 안중근이 일본 제국의 제4, 6대 내무경, 초대 내각총리대신, 초대 귀족원 의장, 초대 추밀원 의장, 초대 한국통감을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사살한 사건이다.
1905년 초대 한국통감을 지냈다가 막후로 물러나 일본 제국에서 추밀원 의장을 지내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는 러시아 제국과의 철도 문제, 경제 현안, 러일전쟁 뒷처리 등을 논의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 재상인 코코흐체프와 회담을 갖기로 하여 러시아가 청 제국에게 조차한 하얼빈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는 회담을 위해 러시아 측에서 제공한 특별 열차를 타고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1909년 2월 7일 안중근을 포함한 12명의 동지들은 연해주에서 동의단지회를 결성하며 각자 왼손 약지를 잘라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을 쓰며 각자 암살에 대한 결의를 다졌으며, 이후 10월 21일 안중근은 신문기사에 이토 히로부미가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을 방문하여 러시아 재무상과 러일 간 경제 회담을 갖는 목적으로 방문한다는 정보를 알아내어,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을 계획한다. 25일 안중근은 거사 동지인 우덕순과 함께 기차를 타고 하얼빈으로 출발하였다. 1박을 머문 끝에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과 우덕순은, 러시아에서 세탁소를 운영한다는 재러시아 한국인 조도선을 만난다. 그는 거사에 동의하였다.
그 중 기차들이 중간에 정차하게 되어서 쉬어간다는 ‘차이자거우(채가구)역’에서 우덕순, 조도선이 거사를 분담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신문 기사에 이토 히로부미의 특별 열차도 차이자거우 역에 정차한다는 예상이 나오자, 세 사람은 차이자거우로 향하여 기차역 객사에 머물며 거사를 준비한다.
그러나 철도들의 분기점인 차이자거우역은 경비가 삼엄해 객사에서 나가 의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던 데다가 러시아 육군 병력이 보안을 이유로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숙소 문을 잠가버려 탈출도 불가능했다.
다행히 당초에 차이자거우에 왔던 안중근은 하얼빈 거사를 위해 우덕순, 조도선에게 차이자거우 거사를 분담하며 자신은 이미 하얼빈으로 이동하였던 상태였다. 만약 이 때 안중근마저 객사에 갇혔다면 하얼빈 거사도 실패하였고 이토 히로부미도 무사히 경제 회담을 마치고 일본으로 살아서 귀국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차이자거우에서 거사에 실패한 우덕순, 조도선은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 성공 이후 차이자거우역 객사에서 러시아 육군 헌병에 체포되어 압송되었다.
차이자거우 거사가 실패함에 따라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건너가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와의 운명을 결정할 거사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단신으로 하얼빈에 도착하여 일본인으로 위장하고 기차역에 입장했다. 서양인들은 물론, 한국인과 일본인도 서로를 외모로 구별하는 게 힘들다. 인종적 특징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기차역에는 양국 수뇌를 환영하기 위해 일본인과 러시아인, 중국인들이 나오게 되었고, 신변 경호를 위해 러시아 육군 헌병 및 청 육군들이 호위 삼아 경계를 서고 있었다. 드디어 이토 히로부미 일행을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고, 기차 안에서 이토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자 환영을 나온 군중들이 러시아 제국 국기와 일장기를 흔들며 양국 수뇌를 환영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와 면식이 없었던 탓에 수많은 군중과 섞여 있는 이토 히로부미를 알아보지 못했고 일을 그르치는가 했다가, 일부 군중이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을 부르자 백발에 길고 흰 수염을 가진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주는 모습을 보고 그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임을 인식했다. 이에 품 속에 있는 권총을 준비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조준하고,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육군 병력 사이에 지나가고 있는 순간 그를 향해 첫 발을 쏘았다. 첫 발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의 몸을 관통하였고, 안중근은 계속해서 2발 ~ 3발을 추가로 발포했다. 이토는 결국 땅바닥에 쓰러졌고, 안중근은 혹시 다른 사람이 이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행들 중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궁내성 대신 비서관 모리, 만주 철도 이사 다나카에게도 총탄을 발포하여 중상을 입히고 총알 한발을 남겼다.
안중근은 즉시 청과 러시아의 호위병들에게 체포되었고, “코레아 후라!!!(한국 만세)”라 외쳤다.
한편 이토 히로부미는 총탄을 맞은 직후 기차 안으로 옮겨져 자신을 수행하던 의사 고야마 젠의 응급 처치를 받았지만 20여 분 만에 숨이 끊어졌고, 동행했던 그의 손자가 이토 히로부미의 유언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하얼빈은 청나라 땅에 러시아 조계지이므로, 러시아 내지는 청나라에서 조사 후 재판받는 게 맞았다. 실제로 한국인 변호사들은 러시아 헌병이나 청나라 경찰이 이를 조사하고 청나라에서 재판하기를 원했지만, 청나라에 있던 일본제국 경찰 영사는 상황의 심각성에 따라 안중근의 신병을 일본으로 넘겨 버린다.
(출처:namu.wiki/w/안중근%20의사%20하얼빈%20의거)
하얼빈 의거 결과
이 사건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덤덤탄에 맞아 사망하였고, 일행 중 일부는 총상을 입어 사상자가 발생했다.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등 관련자 3명은 러시아 헌병대와 청나라 경찰에 체포된 후 러시아 검찰로부터 간단한 조사를 받다가, 저녁에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거쳐 10월 28일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관동주 뤼순감옥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다.
당시 안중근 의사는 자신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로 15가지를 말했다.
검사 미조부치 다카오의 심문을 받을 때 제시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하나. 일천팔백육십칠년, 대일본 명치천황 폐하 부친 태황제 폐하를 시살한 대역부도의 죄.
둘. 일천팔백구십오년, 자객들을 황궁에 돌입시켜 대한 황후 폐하를 시살한 죄.
셋. 일천구백영오년, 병사들을 개입시켜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위협해 강제로 다섯 조약을 맺게 한 죄.
넷. 일천구백영칠년, 다시금 병사들을 이용해 칼을 뽑아들고 위협하여 강제로 일곱 조약을 맺게 한 후 대한 황실 황제 폐하를 폐위시킨 죄.
다섯. 한국내 산림과 하천 광산 철도 어업, 농, 상, 공업 등을 일일이 늑탈한 죄.
여섯. 소위 제일 은행권을 강제하여 한국 내의 땅들을 억지로 팔게 만든 죄.
일곱. 국채 일천 삼백만 원을 한국에 강제로 지게 한 죄.
여덟. 한국 학교 내의 서책을 압수하여 불사르고, 내외국의 신문을 인민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막은 죄.
아홉. 나라의 주권을 되찾고자 하는 수많은 의사들의 봉기를 폭도라며 쏴죽이거나 효수하고 심지어 의사들의 가족까지 십수만인을 살육한 죄.
열. 한국 청년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죄.
열하나. 소위 한국 정부의 대관이라는 오적, 칠적 등 일진회 놈들을 통해 일본의 보호라는 헛소리를 운운한 죄.
열둘. 일천구백영구년 또 다시 거짓으로 5가지 늑약을 맺게 한 죄.
열셋. 한국 삼천 리 강산을 욕심내어 일본의 것이라 선언한 죄.
열넷. 이천만 생령의 살육의 곡소리가 하늘에 끊이질 않고 포성과 총알이 비 오듯 쏟아져 숨쉴 틈 없는 와중에도
한국이 무사태평한 것처럼 명치천황을 속인 죄.열다섯. 동양 평화의 영위를 파괴하여 수많은 인종의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죄.
(출처:db.history.go.kr/id/jh_097r_0010_1440)
또한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는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는 무죄, 이토를 쏴 죽인 나는 사형, 대체 일본법은 왜 이리 엉망이란 말입니까” 라고도 항변하였다.
이후 관동도독부 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1910년 3월 26일에 순국했다.
거사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얼빈역 개보수로 저격지점에 화단 등이 배치돼 실제 저격지점을 알 수 없었으나,
2006년에야 하얼빈시 철도국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바로 그 곳에 화살표 모양의 타일을 비로소 설치했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한 지점에는 마름모 모양의 타일이 배치돼 그때의 일을 증명하고 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기념비 설치 제안에 일본이 반발하자 중국은 아예 안중근 기념관을 건설하였다.
(출처:namu.wiki/w/안중근%20의사%20하얼빈%20의거)
러시아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의 안중근 의사
몇 년 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여행 갔었는데요,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는데 또 안중근 의사 비석을 안 보고 올 순 없어
기차 타고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문화센터에 다녀왔습니다.
안중근 의사 비석 및 소개
타국에서 안중근 의사를 만나 뵈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책을 읽고 인격 수양을 하루라도 거르면, 가시 돋친 말이 입 밖으로 나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를 뜻하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